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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화만발* 여지(餘地)

金成官 황금웃음 2015. 1. 27. 07:03

덕화만발* 여지(餘地)

 

 

*德華滿發*

 

여지(餘地)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는 뜻이지요. 또는 해가 지기 직전에 일시적으로 햇살이 강하게 비추어 하늘이 잠시 동안 밝아지는 자연 현상을 이르기도 하고, 죽음 직전에 이른 사람이 잠시 동안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비유하거나, 사물이 쇠멸하기 직전에 잠시 왕성한 기운을 되찾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회광반조는 빛을 돌이켜 스스로에게 비춘다는 말로,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통해 자신에게 내재된 영성(靈性)을 깨닫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회광반조라는 말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욕심에 끌려 세상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다가 죽을 때가 임박하면 온전한 정신이 한번생기고, 바로 이 맑은 정신을 가지고 지나온 자기 일생을 돌아보며 반성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촛불은 다 타서 꺼지기 직전마지막으로 한번 확 타오르고, 태양은 지기 직전에 화려한 색깔을 내뿜고, 사람도 늙어서 죽기직전에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정신이 맑아집니다. 우리 인간은 해마다 이맘때면 누구나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새해를 맞는 기대가 교차하게 마련입니다. 예년처럼 송구영신이라는 인사말이나, 연하장, 흥청대던 송년회 분위기는 더 이상 보기 어려워졌지만, 새해를 맞는 마음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느 때 보다 갑오년(甲午年) 한 해는 국가적으로 다사다난한 해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말띠 해에는 큰 변고들이 많았습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어처구니없는 일들도 있었고, 한심한 갑 질도 있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죽어간 가슴 아픈 세월 호 참사는 화살에 맞은 경험이 있는 새는 활모양의 굽은 나무만 보아도 겁을 낸다는 고사처럼 유사한 일에 가슴이 철렁일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신년의 다짐도 중요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위(衛)나라의 현인 거원(蘧瑗)은 50세가 되어서 지난 49년 동안 잘못 살아왔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매년 반복되는 다짐과 후회는 어쩌면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지 않을까요?

 

핵심감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어떤 경험으로 인해 형성된 감정이 기억으로 굳어져, 그와 비슷한 상황이 닥쳤을 때 현 상황에 맞는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자동적으로 과거의 경험과 유사한 방식의 판단을 내리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과거가 현재를 왜곡되게 지배할 수도 있다 할지라도, 지나친 자기 확신보다는 과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감정입니다.

 

우리가 늘 상 연말에 발을 헛딛는 시행착오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에 여지(餘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람이 발을 딛는 것은 몇 치의 땅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짧은 거리인데도 벼랑에서는 엎어지거나 자빠지기 십상입니다. 또한 좁은 다리에서도 번번이 시내에 빠지곤 합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아마 곁에 여지(餘地)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군자가 자기를 세우는 것 또한 이와 다를 게 없습니다. 지성스러운 말인데도 사람들이 믿지 않고, 지극히 고결한 행동도 혹 의심을 부를 때가 있습니다. 이 역시 모두 우리들의 언행과 명성에 여지가 없는 까닭일지도 모릅니다. 이 여지의 유무에서 군자와 소인이 갈립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여지가 있어야지, 여지가 없으면 군자는 못 됩니다.

 

군자의 행동에는 늘 여지가 있고, 소인들은 여지없이 각박합니다. 조선시대 성대중(成大中·1732~1809)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나치게 청렴한 사람은 그 후손이 반드시 탐욕으로 몸을 망친다. 너무 조용히 물러나 지내는 사람은 그 자손이 반드시 조급하게 나아가려다가 몸을 망친다.” 역시 여지가 없는 것을 경계한 말씀이지요.

 

그럼 마음속의 잡초를 없애고 여지를 넓혀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한 철학자가 오랫동안 가르쳐 온 제자들을 떠나보내며 마지막 수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들판으로 나가 빙 둘러앉았습니다. 철학자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들 판에 잡초가 가득하다. 어떻게 하면 잡초를 모두 없앨 수 있느냐?”

 

제자들은 학식이 뛰어 났지만 한 번도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지요. 그들은 모두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삽으로 땅을 갈아엎으면 됩니다.” “불로 태워 버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뿌리째 뽑아 버리면 됩니다.” 철학자는 제자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습니다. “이것이 올 해의 마지막 수업이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말한 대로 마음속의 잡초를 없애 거라! 만약 잡초를 없애지 못했다면, 일 년 뒤에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나기로 하자.”

 

일 년 뒤, 제자들은 무성하게 자란 마음 속 잡초 때문에 고민하다 다시 그 곳으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잡초로 가득했던 들판은 곡식이 가득한 밭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런 글귀가 적힌 팻말 하나가 꽂혀 있었습니다. “들판의 잡초를 없애는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다. 바로 그 자리에 곡식을 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자라는 잡초는 ‘선(善 禪)’의 마음으로 뽑아 낼 수 있다.”

 

어떻습니까? 새 해 을미년(乙未年)에는 갑오년 한 해 무성하게 자랐던 마음속의 잡초를 뽑아내면 어떨까요? 밭에 김을 매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하듯이 우리의 마음도 버려두면 악의 잡초가 쉴 새 없이 자랍니다. 마음속의 육적(六賊)의 잡초를 뽑는 것이 수행입니다. 더 자세히 얘기한다면, 마음속의 악과 부단히 싸우는 것이요, 마음속에 일어나는 도둑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육적이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육경(六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중생이 깨달음을 얻는 것을 방해하고 번뇌를 일으키는 여섯 도적들과 같다’는 뜻이지요.

 

사람이 한 세상을 살고 갈 때에 의(義)의 여지가 있어야 하며, 덕(德)이 넉넉해야 하며, 원(願)이 커야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내가 쌓은 공(功) 몰라준다고 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는 공정한지라 우리가 쌓은 공이 무공(無功)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삶에서 여지를 많이 길렀느냐 못 길렀느냐가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한 번 회광반조 합시다. 그리고 새 해 을미년에는 우리의 마음과 말과 행동에 여지를 많이 만들어 혈심의 대인, 참다운 덕인이 되면 얼마나 좋을 까요!

 

단기 4347년, 서기 2014년, 불기 2558년, 원기 99년 12월 31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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