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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조정래, 박태준을 말하다

金成官 황금웃음 2011. 12. 29. 10:11

소설가 조정래, 박태준을 말하다

시사INLive | 조정래 | 11.12.29 09:47

12월13일 타계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추도하는 글을 소설가 조정래씨가 보내왔다. 대하소설 < 태백산맥 > < 아리랑 > < 한강 > 을 쓴 조정래씨는 < 한강 > 을 집필하기 전에 취재차 박태준 회장을 만났다. 그때 인연을 맺은 이후 20년 넘게 박 회장과 교유해왔다. 2007년에는 어린이용 위인전 < 박태준 > 을 쓰기도 했다. 소설가의 눈에 비친 철강왕의 삶은 어떠했을까. 이 엄동설한에 참사람 한 분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10년, 20년을 더 살아야 할 참된 애국자가 이 한겨울에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분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십니다.

날로 세계경제가 나빠지는 상황에서 우리 경제에도 구름이 끼고 있고, 정치권마저 진흙탕 싸움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상태라 그분이 떠나간 빈자리가 찬바람만 가득한 이 겨울 하늘처럼 넓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 사람은 많고 많으나 빼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많기 어렵고, 변함없이 올곧은 양심과 굳센 의지를 가진 참된 사람이란 더욱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 그 드문 사람 중의 한 분이 영영 못 올 길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해냄출판사 제공 2008년 11월21일 조정래 작가(앞줄 오른쪽)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왼쪽)이 '태백산맥 문학관' 개관식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우리는 30년 된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해 시위의 나날을 정신없이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1980년대였습니다. 직접 가투(가두투쟁)를 하지 않더라도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물결치는 젊은이들의 함성을 들으며 우리 모두는 시위 군중이었던 것입니다. 그 격랑 속에서 우리는 '경제'에 관심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긴장 속에 고조되어가고 있었고, 시위 탄압이 거셀수록 분신자살자들까지 생겨나며 우리의 의식 속에는 경제가 자리 잡을 틈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는 경제 열망은,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저항적 정치의식에 기가 꺾여 저만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군부독재 30년을 무너뜨리게 되었습니다.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1980년대가 다 가고 1990년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참 숨 가쁘고 위태롭게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 한강 > 과 박태준

그런데 문득 우리의 GDP가 1만 달러가 되었고, OECD에 가입해야 된다고 분주했습니다. 어어,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 모두는 그렇게 어리둥절해했습니다. 시위만 하느라고 아무 관심 없이 보냈던 경제가 1만 달러라니요!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상황 속에서 저는 < 태백산맥 > 을 쓰고, < 아리랑 > 을 거쳐 < 한강 > 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만 달러 시대의 도래에 대하여 저는 누구보다도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시위 때문에 나라 다 망한다고 시끄럽기도 했는데 어떻게 나라는 망하지 않고 그 반대로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되었다는 것입니까.

저는 < 한강 > 에서 6·25 이후 남북한 정권은 민족 분단을 어떻게 획책·강화시켜왔는가 하는 점과 함께, 우리의 경제발전은 어떤 경로를 거쳤고 그 참주인공들은 누구인가를 밝혀내는 두 가지 사실을 쓰고자 했습니다. 그러니 저의 놀라움은 특히 클 수밖에 없었고, 그 놀라움은 꼭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 한강 > 의 취재는 그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도정이기도 했습니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오, 구하라 얻을 것이오. 이 말씀은 진정 진리였습니다. 저의 취재의 곡괭이질 앞에 드러난 것은 포스코의 철강 생산과 중동 여러 나라에서 벌어들인 오일달러 두 가지가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이룩해낸 주역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건 저의 일방적인 생각이 아니고 경제학자들의 동의와 확인을 거친 것이었습니다.

쇳덩어리 인간

포항제철과 광양제철을 탄생시킨 사람 박태준을 취재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그 피할 수 없는 필연 위에서 박태준 회장님과 저의 인연의 고리가 꿰어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독자들은 < 한강 > 에서 포스코와 박태준을 왜 그렇게 많은 양으로 다루었는지 궁금해합니다. 예, < 한강 > 의 한 파트는 평균 120장(200자 원고지) 정도씩입니다. 그런데 포스코를 다룬 파트는 그 두 배에 이르는 220장 정도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우리 경제발전사에서 포스코가 갖는 비중이 그만큼 크고, 영향력과 성과 또한 그만큼 지대했기 때문입니다.

올해에 이르러 우리나라는 수출 세계 9위의 경제대국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중심 품목은 가전·자동차·조선·각종 기계 등입니다. 그 상품들은 무엇으로 만들어집니까. 쇠가 없어서는 그런 가전산업도 자동차산업도 조선산업도 각종 기계산업도 이룩될 수 없다는 그 당연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소홀히 하거나 깜빡 잊을 때가 많습니다.

그 제품들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춰 이익을 많이 남기고, 그 이익들이 합쳐져 우리들 모두를 잘살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곳, 그곳이 포스코 아닙니까. 포스코에서 첫 쇳물을 생산해낸 것이 1973년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38년 동안 포스코에서 철강을 싸게 생산해내서 각종 산업에 공급하지 않고 비싸게 수입해서 썼더라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굳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유난히 눈썹이 짙은 박태준은 그에 걸맞도록 눈빛이 형형하고 매섭습니다. 우리의 수많은 내장들 중에서 오로지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기관이 뇌이고,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눈입니다. 그래서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고, '눈은 마음의 호수'라는 문학적 표현도 나온 것입니다. 생각이 치열하고, 의지가 강직한 사람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빛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박태준 회장님의 강렬한 눈빛과 압도적 카리스마는 널리 소문나 있습니다. 그분은 남다른 열정과 굳센 신념과 불변의 정직과 과감한 실천의 소유자였기에 그 누구에게나 당신의 실체보다 몇 배 큰 쇳덩어리 무게를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외로운 애국자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
이것은 그분이 육사 생도 시절부터 세웠던 인생의 좌표였습니다. 너무 경건하고 엄숙하여 숨이 막히고 가위눌리려 합니다. 젊은이들은 촌스럽고 웃긴다고도 할 것입니다.





ⓒ포스코 제공 1973년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가운데)이 포항 1고로의 첫 출선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그분이 젊었던 시절에는 그런 무거운 형틀 같은 사명감을 스스로에게 짐지워야 하는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해방이 되었습니다. 나라는 가난에 찌들려 있었습니다. 새 나라는 세워져야 했습니다. 정신 제대로 든 젊은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젊은 박태준이 스스로의 앞길에 내건 플래카드가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였던 것입니다.

항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 항심으로 평생 변함없이 그 마음을 지켜 그 길을 걷다가 이 세상을 떠나가셨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그분 가까이에서 조국 사랑의 변함없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감동할 수밖에 없었고, 그 길을 가기 위해 사욕·사심을 갖지 않는 그 청렴에 절로 존경이 우러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도에 8억 인구가 있지만 마하트마 간디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 길은 옳으나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현실도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너나없이 돈에 홀려 정신 잃은 세상에서 박태준의 길을 따라가기란 너무 어렵고, 어쩌면 그분은 이 시대의 마지막 애국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외로운 애국자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돋보입니다.

젊은 사람일수록 박태준을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기업인으로 알고 있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은, 노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인으로 태어난 줄 안다고 하니까, 세상사를 숱하게 잘못 아는 것은 젊은이들의 용서받을 수 있는 특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박태준이 엄청난 부자라거나, 흔한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는 것 등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잘못입니다.

그분은 집을 14억원에 팔아 10억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증하고 전세살이를 하다가 돌아가신 가난뱅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대재벌이 될 수 있는 사기업을 한 것이 아니라 국영기업 제철회사를 설립·운영했고, 물러나면서는 퇴직금을 받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주식을 단 한 주도 갖지 않았습니다.

이런 정직·청렴한 그분을 바로 아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바르게 세우는 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고, 나침반이며 영원한 사표입니다. 그분을 우러르고, 그 죽음을 애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리고 제가 굳이 위인전을 써야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춥고 먼 길 편안히 가소서.
조정래 (소설가·동국대 석좌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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