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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CO 창립 40주년] 되돌아본 영광의 역사

金成官 황금웃음 2008. 4. 3. 18:29
[POSCO 창립 40주년] 되돌아본 영광의 역사 - 모래벌판에 ‘제철보국’ 첫 삽

‘우향우’ 정신으로 매진 … 1973년 포항 1고로 완공
착공 앞서 주택단지부터 조성 ‘사람 중심 경영’ 지향
  

일관제철소 건설은 거대한 자본과 오랜 세월을 두고 축적해 온 기술과 경험 없이는 감히 성공하기 힘든 사업이었기에 우리나라와 같은 개발도상국으로서는 그 시도 자체가 큰 모험이었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이 공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초소재인 철을 안정적으로 생산·공급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야 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일관제철소 건설은 국가경제 건설에 나선 모든 개발도상국의 꿈이요, 지상명제였다.

  

1970년 4월 1일 경북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의 건설현장에서 열린 포항종합제철공장 착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김학렬 부총리, 박태준 사장(왼쪽)이 착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

 

민족의 숙원을 현실로

우리나라는 1950년대부터 일관제철소 건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여러 차례 일관제철소 건설을 시도했으나 외자를 조달하지 못해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던 중 1965년 5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코퍼스사의 포이 회장과 국제차관단 구성에 관해 논의한 것이 계기가 돼 철강 선진 5개국 8개사가 참여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 구성되면서 진전을 보았다.

 

KISA와의 제철소 건설사업이 원만하게 진행되자 정부는 1967년 6월 포항을 일관제철소 입지로 선정하고, 9월에 당시 대한중석을 종합제철 실수요자로 확정했다. 10월 3일 포항 현지에서 종합제철 공업단지 기공식을 열고, 11월에 경제기획원장관 자문기관으로 ‘종합제철 건설사업 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포스코는 1968년 4월 1일 창설요원 34명으로 역사적인 창립을 맞았다.

 

그러나 외부 여건은 어려운 상황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정부와 포스코는 IBRD와 KISA 회원국 등을 상대로 차관을 제공받으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당시 박태준 사장은 일관제철소 건설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귀국하던 중 하와이에서 농림수산 부문에 쓰기로 돼 있는 대일청구권자금 잔액을 종합제철 건설자금으로 전용해 일관제철소를 건설하자는 제안을 냈다.

 

이에 정부는 1969년 6월 경제기획원에 ‘종합제철 건설전담반’을 설치해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일관제철소를 건설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1969년 8월 ‘제3차 한일각료회담’에서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 일관제철소 건설사업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일관제철소 건설의 대역정은 1970년 4월 1일 경상북도 영일만에서 포항 1기 설비 종합착공과 함께 시작됐다.

 

초기 건설 당시 포스코는 계획된 공기 안에 완벽한 품질을 갖춘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박태준 사장은 회사 직원은 물론, 수주업체와 건설업체 요원에게까지 민족숙원사업 건설에 동참한 데 대해 긍지와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만일 실패할 경우 모두가 ‘우향우’해 동해 바다에 투신하겠다는 책임감으로 건설에 매진하자고 독려했다. 우향우 정신은 초기 건설공사를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후 ‘제철보국’과 함께 포스코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어로서 성장과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포스코는 건설 초기부터 사람을 중시하는 경영을 추구하며 부족한 자금과 자원, 일천한 기술과 경험을 극복해 왔다. 사람을 중시하는 경영은 초기 주택단지 건설을 비롯한 포스코 고유의 복리후생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후 직원 자녀 교육정책·문화정책으로 확산됐다.

 

사명감과 책임감에 투철한 건설요원의 노력에 힘입어 1973년 7월 3일 조강연산 103만톤 규모의 포스코 1기 설비가 역사적인 준공을 맞았다.

 

이후 포스코는 설비 확장에 돌입했다. 1기 건설과 달리 2기 건설부터는 과거의 경험과 교훈을 활용할 수 있어 유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건설공사를 차질없이 진행함과 동시에 완벽한 조업을 이루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영일만에 아로새긴 ‘철의 신화’

 

특히 포스코는 3기 건설 시에는 전 공정에 걸쳐 공기가 2∼3개월씩 지연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건설비상을 선포했고 설비별로 공사담당 임원을 임명해 각자의 책임으로 할당된 설비공사 현장의 공기를 맞추도록 하기도 했다.

이러한 악전고투 속에서도 포스코는 공사품질에는 추호의 소홀함도 용납하지 않았다.

<4면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