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결혼 6년 만인 1987년 처음으로 낸 인천 월미도 의 분식집에서 31살의 전계화씨.
"나이 서른 살쯤 떼어 장롱에 넣어두고 열정적으로 사세요"
초등학교만 나와 친척집 허드렛일 하다
결혼 후 차린 식당 잘나갔는데 외환위기 때 쫄딱 망해
오십 넘어 늦공부 시작
오늘도 나는 꿈을 퍼뜨린다
“오빠가 고등학교에 가야 하니, 너는 중학교를 포기하거라.”초등학교 6학년 어느 겨울날 아버지의 통보였다. 한 해 내내 도시락은 쌀 몇 알 없는 보리밥에 김치와 단무지 반찬이 전부였다. 가난한 집안 사정은 어린 내 눈에도 뻔히 보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의사였던 먼 친척 아저씨네 집에 ‘아기 돌보미’로 들어갔다. 돈도 받지 않고 온갖 허드렛일을 다했다. 아기 보고, 병원 청소하고, 밥과 설거지를 하던 내게 아저씨는 꼭 1년 후 “입학금을 대줄 테니 중학교에 가라. 이제는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고 하셨다.
아저씨의 도움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곤 충주여자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빨리 졸업해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학교에 다닐 때 신문을 돌리고 급우들에게 문학 전집을 팔아 학비와 용돈을 마련했다. 한 권에 300~500원씩 받고 책을 팔기 전 재빨리 내가 먼저 책을 읽어치웠다. 책이 재미있기도 했고, 친구들에게 내용을 재미있게 설명해줘 가며 팔면 ‘실적’이 더 좋았다. 내 입심이 꽤 괜찮다는 걸 알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충주의 작은 건설회사에 경리로 취직했다. 1년 후 서울로 직장을 옮겼고 회사에서 전기기사로 일하던 남편을 만났다. 신혼집 구할 돈이 없던 우리는 둘 다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털어 셋집을 얻었다. 남편은 2년 동안 직장을 구하지 못해 고전했지만 나중에는 한 식품회사에 취직을 했다. 나도 집에서 두 아이를 키우면서 뜨개질 부업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결혼한 지 6년 만에 인천 월미도에 분식집을 냈다. 식탁 6개를 놓고 식당에 딸린 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운 좋게 주변 공장과 군부대에 입소문이 나서 손님이 꽤 많이 들었다.
식당은 계속 번창해 백반을 팔던 식당을 고깃집으로 확장했다. 남매가 고등학생이 됐을 때 외환위기가 우리 가족을 강타했다. 식당은 기울었고,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선배에게 사기를 당했다. 식당에 ‘빨간 딱지’가 붙었다. 음식 팔아서는 이자도 감당 못할 상황이었기에 가게도 집도 팔아야 했다. 살아온 날들이 너무 허무했다. 그 뒤 보증금 없는 허름한 식당을 서울에 열어놓고 하루 5시간만 자면서 생활비만 간신히 벌었다. 머릿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는 삶일까’ 하는 질문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여고 시절 문학 전집을 팔며 읽었던 책들, 중학교 입학하며 가졌던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꿈….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은 욕구가 점점 커졌다. 두 아이도 크고 가정도 안정을 찾아가던 무렵 나는 16년 동안 이어오던 식당 일을 정리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밥집 아줌마’로 인생을 마무리할 것 같았다.
- ▲ 전문 강사 전계화씨가 이달 초 서울 양재동 한국강사협회에서 강사 지망생들을 대 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2008년 10월 지인의 소개로 한 장애인 시설에서 가진 첫 강의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30~40명을 모아놓고 ‘행복을 부르는 웃음’이라는 주제로 내 경험을 섞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선생님 말씀 들으니까 저도 공부하고 싶어졌어요”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한 40대 여성을 보며 나의 ‘두 번째 인생’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는 걸 느꼈다.
요즘 내 고객은 ‘가슴 답답한 사람들’이다. 지친 직장인들, 앞날이 불안한 대학생들, 인생이 무료하다는 어르신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연락을 받을 때마다 나는 대한민국 구석구석으로 달려간다. 경력 4년차인 나는 베테랑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나 내 수입만으로 우리 부부 생계를 꾸릴 정도의 강의 요청은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예전의 내가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줬다면, 지금의 나는 그들의 공허한 마음을 다독이는 일을 한다. 친척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아이가 다른 사람들의 꿈을 지펴주는 강사가 될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했을까. 늦은 공부에 시간과 돈을 쏟아부었던 지난 3년이 그 초라한 아이를 자신만만한 강사로 바꾸어 놓았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 집 자명종은 매일 새벽 5시 20분에 울린다. 강의가 있든 없든, 화장과 머리를 손질하고 감사의 하루를 시작한다. 더 새롭고, 더 열정적이고, 더 알찬 강의를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과 씨름하고 강의 연습을 하면서 촘촘하게 시간 관리를 한다. 공부를 한 단계 더 밀어붙이고 싶어 지난해 한 대학의 사회교육대학원 기업교육학과에 등록했고 지금은 석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나이가 많아서 뭘 할 수 있겠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웃으며 이렇게 답한다. “나이 서른 살쯤 장롱에 떼어 두고 홀가분하고 열정적으로 사세요. 인생은 재방송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