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자 띄우니 내가 사네요
출연자 띄우니 내가 사네요.”
유재석의 능수능란한 애드립과 편안한 진행솜씨를 보면 ‘저 사람이 6년 전 마이크를
들고 부들부들 떨었던 그 사람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을까?
“제가 말하는 것보다 남의 말을 듣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
습니다. ‘방송의 중심은 나다’ 그리고 ‘내가 나서면 더 재밌다’고 착각했던
그때는 ‘오버’도 많이 하고, 남 탓을 많이 했는데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
이었는지...”
출연자들을 돋보이게 해주는 게 MC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란 것을 깨닫기까지는
적지 않은 실패의 경험이 있었다. 데뷔 초에는 튀어보기 위해 과장된 연기를 할 때도
있었고, 스스로 일어서기보다 스타 선배들과의 친분에 기대려 한 적도 있었다.
그럴수록 출연 기회는 멀어져갔다.
“방송을 그만둘까 방황하던 시절, 많은 조언을 해준 사람이 김용만 선배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을 돋보이게 해주고 튀어야 할 때는 확실하게 튀는 모습을 보여
줘라’ 는 조언은 지금도 금과옥조로 삼고 있죠. 선배가 베풀어준 것 이상으로
후배들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얼마 전 ‘닥터 노’ 노홍철이 자신의 방송활동에 가장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으로
유재석을 꼽은 것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출연자들이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비결은 무엇일까.
“일단 출연자보다 말을 적게 하려고 합니다. 출연자들이 생뚱맞은 답변을
하더라도 살을 붙여 재미있게 해주려고 하지요. 안 그러면 출연자가 얼마나
무안하겠어요. 또 재치 있는 답변에는 아주 크게 웃어주는 겁니다.”
그는 끊임없이 샘솟는 애드립의 원천을 이렇게 설명했다.
“책도 읽지만, 얘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동료와의 잡담에서도 유용한 애드립
재료들이 많이 나옵니다. 녹화해 둔 예는 프로들을 보면서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답변할까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쟁쟁한 MC들이 많은 데
아무런 ‘개인기’도 없는 제가 이렇게 버티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카리스마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그의 최대 장점이라는 게 방송가의 중론이다.
PD들의 중론은 이렇다. “끼가 있는데다 성실하기까지 하다.” “출연자에 대한 배려가
남다르다.” “편안하고 안정적인 진행이 돋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그램을 장악하고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출연자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카리스마는 제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지요. 나만의 강점인
부드러움을 쵀대한 살려보다 했던 것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꿈은 의외로 소박했다. “언젠가 제가 누리고 있는 이 자리가 자연스럽게
후배들에게 넘어갈 것이고, 그 때는 후배들이 진행하는 프로에 게스트로 출연해
후배들을 빛내주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날렸다.
“데뷔 14년차인 중견 MC호서 이제는 ‘메뚜기’란 별명이 거북하지 않나요?”
“거북하긴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별명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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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석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여기에 삶의 지혜와 리더십의 핵심이
들어있음을 깨닫는다.
인생에서 그는 주연을 하려는 욕구로부터 물러나 훌륭한 조연이 되기로 하면서 삶이
바뀌었다. 흔히 능숙한 사회자들이 출연자나 청중의 한 사람을 웃음거리고 만들어
시청자나 다른 청중들을 웃게 하는데, 웃음거리가 된 사람의 화끈거리는 모욕감은
잠시 후 청중들에게 급속히 전염된다. 그들은 웃음이 사라질 무렵 ‘혹시 나도 저렇게
망신당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청중들이 불안해져서 마음을
닫는다. 분위기는 차츰 부정적인 기운이 지배하게 되고, 사회자는 관중이나 청중의
호응이 없는 가운데 온갖 개인기로 고독하게 연기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예리한
재치로 출연자나 청중을 아프게 찌르는 유능한 진행자들에게 사람들은 ‘잘 하지만
마음에 안 든다’는 평가를 내린다. 출연자나 청중을 돋보이게 해주고 자신은 말을
줄이는 것, 이것이야 말로 삶의 메마른 땅에서 기쁨의 샘물이 솟아나게 하는 지혜가
아닐 수 없다. 리더는 특히 말수가 적어야 한다는 금언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인간관계에서는 나를 중심에 두지 않고 상대를 중심에 두어야 하고, 내가 있어야
재미있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그가 재미있고 의미 있어야 전체가 재미있고
의미 있다는 깨달음은 그의 마음을 비우게 했고 그 빈 자리에 온갖 축복으로
채워주었다.
재치 있는 애드립은 관념적이고 이성적인 책보다 사실적이고 감성적인 일상의 대화에
있으며, 다른 진행자의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라면 저런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늘
가상현실을 그리고 시뮬레이션하며 ‘성공연습’을 해온 그의 삶이 돋보인다.
힘을 결집하는 집단은 카리스마가 요구되나, 오락이나 교양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청중과 출연자, 사회자가 하나가 되는 화합의 무대를 지향하므로 프로그램을 장악하는
카리스마보다 출연자들의 자발적인 의욕으로 자연스럽게 진행되게 하고 진행자는
출연자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그야말로 훌륭한 조력자나 조연으로 남아야 함을 깨닫는
순간 그는 자신의 고유한 특성인 순수한 호의가 발하는 광채는 주위를 기쁨으로 파동
치게 한 것이다.
동료나 후배를 각별히 챙기는 마음가짐도 가슴에 스민다.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선배에게는 깍듯하지만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인 동료나 후배는 늘 경계하고 견제
하는 것이 보통의 생각이다. 보통의 생각으로 되지 않으면 그 생각이 잘 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정반대로 생각하면 일이 잘 풀릴 가능성이 높다. 시도해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토록 얄밉고 자신을 골탕 먹이던 자신과
친구가 된 것이다. 자칫 방송계를 떠날 뻔하기도 했지 않은가? 그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인 별명 ‘메뚜기’를 애틋이 생각하는 것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가 장수하는
MC가 될 것은 전혀 의심이 가지 않는다.